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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1월] 바인더 제팅 3D 프린팅 기술, 복셀젯(voxeljet AG) 방문기

by 로브로브 2025. 12. 28.

뮌헨 근교에서 만난 적층 제조(AM)의 거인

독일 뮌헨에서 차량으로 약 30분, 평화로운 프리드베르크(Friedberg)에 위치한 복셀젯(voxeljet AG) 본사를 방문했습니다. 비 내리는 차분한 날씨 속에서 마주한 깔끔한 사옥은 독일 제조업 특유의 정갈함을 닮아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견학을 넘어, 바인더 제팅(Binder Jetting) 기술이 글로벌 제조 산업, 특히 자동차와 예술 분야를 어떻게 혁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 위치: Paul-Lenz-Straße 1a, 86316 Friedberg, 독일

복셀젯(voxeljet AG)


 

복셀젯(voxeljet) 기업 개요 및 독보적 위상

복셀젯은 '바인더 제팅'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용 대형 3D 프린팅 시스템을 제조하며, 동시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부품을 직접 생산해주는 '온디맨드 서비스(On-Demand Service)' 센터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바인더 제팅(Binder Jetting) - 상세 원리와 메커니즘

복셀젯의 핵심인 바인더 제팅(Binder Jetting)은 ASTM(미국재료시험협회)에서 정의한 7가지 3D 프린팅 방식 중 하나로, 파우더(가루) 위에 액체 바인더(접착제)를 분사하여 굳히는 방식입니다. 레이저로 한 점씩 녹이는 방식(SLS/SLM)에 비해 면 단위로 작업이 진행되어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며, 별도의 지지대(Support) 제거 과정이 수월해 대량 생산에 유리합니다. 그 구체적인 공정과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계별 공정 프로세스

바인더 제팅은 마치 잉크젯 프린터가 종이 위에 잉크를 뿌리는 것과 매우 유사한 원리로 작동합니다.

  • 1단계 (Recoating): 프린터의 작업대(Build Platform) 위에 미세한 파우더(모래, 플라스틱, 세라믹 등)를 머리카락 굵기보다 얇은 두께(보통 150~300마이크로미터)로 평평하게 깔아줍니다.
  • 2단계 (Printing): 잉크젯 프린터 헤드(Print Head)가 지나가면서 데이터 상에 형상이 있는 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액체 바인더(접착제)를 분사합니다. 바인더가 닿은 가루는 서로 엉겨 붙으며 즉시 단단하게 굳습니다.
  • 3단계 (Layering): 한 층의 작업이 끝나면 작업대가 설정된 두께만큼 아래로 내려가고, 다시 그 위에 새로운 파우더를 덮습니다. 이 과정을 수천 번 반복하여 3차원 형상을 완성합니다.

레이저 방식(SLS/SLM) vs 바인더 제팅 : 압도적인 속도의 차이

가장 큰 차별점은 '속도'와 '열'에 있습니다.

  • 점(Point) vs 면(Area)의 싸움: 기존의 금속 3D 프린팅(SLM)이나 플라스틱 소결(SLS) 방식은 레이저 불빛 하나가 바닥을 쫓아다니며 점을 찍고 선을 그리는 '점 단위(Point-wise)' 방식입니다. 그림을 펜으로 하나하나 색칠하는 것과 같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 획기적인 속도: 반면 바인더 제팅은 수만 개의 노즐이 달린 거대한 프린터 헤드가 쓱 지나가며 한 번에 넓은 면적에 접착제를 뿌리는 '면 단위(Area-wise)' 혹은 '선 단위(Line-wise)' 방식입니다. 마치 복사기가 문서를 스캔하듯 지나가기 때문에 출력물의 크기가 크거나 개수가 많아도 출력 시간의 증가 폭이 레이저 방식에 비해 현저히 적습니다.

서포트(Support)가 필요 없는 자유로운 디자인

대부분의 3D 프린팅은 공중에 떠 있는 형상을 만들 때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지지대(Support)를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바인더 제팅은 굳지 않은 주변의 파우더들이 출력물을 든든하게 받쳐줍니다.

  • 디자인 자유도: 복잡한 내부 유로가 있는 부품이나 서로 겹쳐 있는 형상도 지지대 설계 고민 없이 자유롭게 출력할 수 있습니다.
  • 후처리 비용 절감: 금속 프린팅의 경우 서포트를 떼어내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바인더 제팅은 출력이 끝난 후 굳지 않은 가루만 털어내면(De-powdering) 되므로 후처리 공정이 매우 간편하고 경제적입니다.

상온 공정 (Cold Process)

레이저로 금속을 녹이는 방식은 엄청난 고열이 발생하여 제품이 휘거나 뒤틀리는 열 변형(Thermal Distortion) 문제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인더 제팅은 상온에서 접착제만 뿌리는 방식이므로 열에 의한 변형이 거의 없어, VX4000이나 VX9000 같은 초대형 사이즈의 부품도 정밀하게 출력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 스케일의 기술 : VX4000과 VX9000

상용화된 세계 최대 시스템 : VX4000

현장에서 주력으로 소개된 VX4000은 4,000 x 2,000 x 1,000 mm의 빌드 사이즈를 자랑합니다. 이는 소형차 한 대 크기에 육박하는 거푸집을 분할 없이 '단 한 번(One-piece)'에 출력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 개발 목적: 해상 풍력 발전 터빈(Haliade-X)의 핵심 부품인 '나셀(Nacelle)'을 주조하기 위한 초대형 거푸집 제작용입니다.
  • 의의: 기존에 수개월이 걸리던 초대형 주조품의 패턴 제작 기간을 단 며칠로 단축시키며, 에너지 산업의 공급망을 혁신하고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괴물 : VX9000 (Project ACC)

더 놀라운 것은 최근 공개된 VX9000의 존재입니다. GE Vernova, 프라운호퍼 IGCV와 협력하여 개발한 이 시스템은 무려 약 9.5 x 4.5 x 1.5 m (또는 설정에 따라 9m x 7m 급)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가집니다. 이번 방문에서 눈으로 직접 본 VX9000의 모습은 제품이라기보단 하나의 소공간으로 보였답니다.

이번 방문과 기술 조사를 통해 확인한 복셀젯의 가장 큰 경쟁력은 단연 '크기(Scale)'였습니다.


 

전시품 : 스크린과 박물관을 넘나드는 기술

본사 쇼룸에서는 기술이 예술과 만나는 접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007 스카이폴의 애스턴 마틴 DB5 (1:3 스케일)

영화 <007 스카이폴>의 폭발 씬을 위해 제작된 애스턴 마틴 DB5는 복셀젯의 대표적인 포트폴리오입니다.

  • 제작 비하인드: 제작진은 1960년대 원형 차량을 3D 스캔한 후, 복셀젯 PMMA(플라스틱) 소재를 활용해 1:3 비율의 정밀 모형 3대를 제작했습니다.
  • 디테일: 총 18개의 개별 부품으로 출력되어 조립되었으며, 이후 크롬 도금과 도색을 거쳐 실제 차량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퀄리티를 구현했습니다. 덕분에 실제 클래식카를 파괴하지 않고도 완벽한 폭파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스타워즈(Star Wars) 속 헬멧과 소품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워즈> 시리즈에 사용된 캐릭터 헬멧과 다양한 소품들도 바로 이곳의 프린터에서 탄생했습니다.

  • 영화 산업의 혁신: 영화 소품은 디자인이 매우 복잡하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이 필요해 일일이 금형을 만들기에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듭니다.
  • 활용: 복셀젯의 기술은 금형 없이도 복잡한 형상의 헬멧이나 우주선 부품 모형을 빠르게 출력할 수 있어, 납기 준수가 생명인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디지털 고생물학 (Digital Paleontology)

박물관의 공룡 화석 복원에도 이 기술이 쓰입니다.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의 티라노사우루스 '트리스탄(Tristan)'의 두개골 복원 프로젝트가 대표적입니다. 무거운 실제 화석 대신, 3D 스캔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볍고 정교한 복제품을 출력하여 관람객에게 선보이거나 연구용으로 활용합니다.

복셀젯(voxeljet AG)복셀젯(voxeljet AG)

여러 3D프린팅 업체를 다니면서 느낀 건, 예술 분야에서 3D프린팅의 시도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정교하고 복잡한 형상을 소량으로 제작하는 데엔 3D 프린터 만한 공법이 없었기 때문아닐까 싶네요/


 

복셀젯의 주요 3대 핵심 공법

복셀젯의 기술은 크게 소재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뉩니다.

샌드 바인더 제팅 (Sand Binder Jetting) : 주조의 혁신

  • 공정: 미세한 실리카 샌드(Silica Sand)에 바인더를 뿌려 주조용 거푸집을 만듭니다.
  • 적용: 벤츠, 포르쉐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시제품 엔진 블록, 복잡한 유압 밸브, 대형 선박의 임펠러 등을 주조할 때 사용됩니다.

PMMA 정밀 주조 : 왁스를 넘어서

  • 공정: 왁스 대신 PMMA(아크릴 계열 플라스틱) 분말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만든 왁스패턴은 세라믹 슬러리 등으로 쉘 코팅하여 거푸집을 만듭니다. 이를 고온의 가마에 넣어 안쪽의 PMMA 모형을 증발시킵니다. 빈 공간에 쇳물을 부어 최종 금속 제품을 얻습니다.
  • 장점: '소실 모형 주조(Investment Casting)'에서 사용되는 왁스 패턴은 크기가 커지면 변형되거나 부러지기 쉽습니다. 반면 PMMA는 강도가 높아 대형 패턴 제작이 가능하며, 주조 시 100% 연소되어 재(Ash)가 남지 않는 우수한 소실성을 가집니다.

HSS (High Speed Sintering) : 플라스틱 양산의 미래

  • 기술 심화: 적외선 흡수 잉크(Infrared Absorbing Ink)를 파우더에 분사한 뒤 적외선 램프를 통과시켜 잉크가 묻은 부분만 선택적으로 융해(Sintering)시키는 기술입니다.
  • HP MJF와 비교: 이 방식은 HP사의 MJF(Multi Jet Fusion) 기술과 매우 유사합니다. 두 기술 모두 레이저(점)가 아닌 잉크젯 헤드(면)를 사용하여 출력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HP가 디테일링 에이전트(Detailing Agent)를 추가해 정밀도에 집중한다면, 복셀젯의 HSS는 더 넓은 빌드 사이즈와 단순화된 공정으로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효율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 차별점: 레이저 방식(SLS)보다 훨씬 빠르며, 사출 성형에 버금가는 물성을 가진 PA12(나일론) 부품을 금형 없이 대량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발 아웃솔이나 자동차 내장재 부품 양산에 적합합니다.

차세대 기술 : 무기 바인더(Inorganic)와 세라믹

실제로 보진 못 했지만 자료상으로 보기에 관심이 가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무기 바인더 (Inorganic Binder System - IOB)

  • 배경: 유럽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주조 공장의 배기 가스 및 악취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 기술: 기존 유기 바인더와 달리 타더라도 유해 물질이 나오지 않고 수증기만 배출되는 친환경 바인더입니다.

테크니컬 세라믹 (Technical Ceramics)

복셀젯의 고난도 공정으로, 산업용 '테크니컬 세라믹'을 활용해 반도체나 우주항공 부품을 만듭니다.

  • 주요 소재: 절연성이 좋은 하얀색 알루미나와 다이아몬드급 경도의 실리콘 카바이드 분말을 사용합니다.
  • 그린 파트(Green Part): 출력 직후에는 바인더로 형태만 유지한 상태라 찰흙처럼 약합니다. 이 단계를 '그린 파트'라고 부릅니다.
  • 소결(Sintering): 약한 그린 파트를 고온 가마(Furnace)에 넣고 굽는 필수 공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인더는 증발하고 세라믹 입자들이 단단히 융합되어 최종 부품이 완성됩니다.

반도체 장비 부품이나 우주 항공 분야의 특수 노즐 제작에 활용됩니다.


에필로그 : 독일의 '브로트차이트(Brotzeit)' 문화

기술 투어 후 미팅룸에서 마주한 것은 독일식 실용주의 환대의 정석이었습니다. "간단한 스낵"이라는 안내와 달리, 테이블 위에는 '브로트차이트(Brotzeit, 빵 먹는 시간)' 문화가 그대로 반영된 샌드위치(벨레그테 브뢰트헨)와 프레첼이 가득했습니다. 처음 방문 시 제공 받았던 물과 음료(독일 국민 생수/탄산수인 타이나허(Teinacher)와 달콤한 사과 주스(Apfelsaft)로 추가로 받았지요.

독일의 실속 있는 식문화: 브로트차이트(Brotzeit)

독일에는 '브로트차이트(Brotzeit, 빵 먹는 시간)'라는 독특한 식문화가 있습니다. 거창한 요리 대신 빵, 소시지, 치즈 등을 투박하게 차려놓고 든든하게 끼니를 해결하거나 간식으로 즐기는 시간입니다. 독일인들에게 손님 접대란 쿠키 몇 조각 같은 가벼운 다과보다 배를 실질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풍성한 빵'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미팅에서 준비된 주먹만한 샌드위치인 '벨레그테 브뢰트헨(Belegte Brötchen)' 역시 이러한 독일식 실용주의 환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복셀젯(voxeljet AG)

화려한 장식보다는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실속 있는 음식에서, 겉치레보다 기술의 본질(속도, 크기, 정밀도)에 집중하는 복셀젯의 기업 철학이 겹쳐 보였습니다. 산업용 3D 프린팅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목격한 뜻깊은 방문이었습니다.